말씀

[주일예배] 240721 주일 | 언약의 증거 | 창세기9:8-17 | 임현우 목사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4회 작성일 24-07-23 16:03


언약의 증거 (창9:8-17)

도입: 자연 재해 앞에 무력한 우리

7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곳곳에 비 피해가 이어집니다. 위성으로 들여다보고, 슈퍼컴퓨터로 계산하고, 각종 시설을 구비하는데도 물난리가 납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도, 치수는 어려운 일입니다. 기술이 발전해도, 한계는 여전합니다. 단지 비가 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터전은 잠길 수 있습니다.

자본이 집중되고, 도시 인프라가 구축되어도 그렇습니다. 2년 전에도 비가 많이 왔습니다. 저도 주차장에 물이 차올라서 밤 중에 배수구를 청소했습니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돌리려고 모래주머니를 쌓았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거리에, 차들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비싼 차들이 하루아침에 고철이 되었습니다. 그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룻밤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을 때, 노아의 홍수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 대한 기존의 인상

오늘 본문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를 다룹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룬 장면입니다. 이 언약을 노아 언약, 노아 계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주일학교 시절, 노아의 방주를 배웠습니다만 동화 속 이야기처럼 남아 있습니다. 노아와 동물들과 나무로 된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림이 참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성인이 된 후에 이 말씀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에 여러 언약이 있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나,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자주 다루지만, 노아 언약은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 언약은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 될 언약입니다.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와 다음 세대, 모든 피조물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은 홍수가 끝나고 배에서 내리는 장면입니다. 창조 이후, 인간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개인의 실패를 넘어 문명의 실패를 다룹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성을 쌓고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그 성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죄악이 넘쳐났습니다. 죄악은 성벽을 넘쳐흘러 가기 시작합니다. 땅을 죄로 물들입니다. 인간의 죄가 그저 개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멸망으로, 모든 생명의 멸절로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자기의 죄의 결과만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게 죄책이 전가됨을 말씀합니다. 죄의 결과는 이토록 참혹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노아의 홍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을 태우도록 했습니다. 죄로 인해 파멸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들만이 살아남습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와 그 가족들은 어떤 마음으로 나왔겠습니까? 우리는 살았다 하면서 환호성을 치면서 뛰어나왔겠습니까? 이제는 꿉꿉한 방주를 벗어났다며 즐거워했겠습니까? 재난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외상을 겪게 됩니다. 트라우마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참사의 생존자입니다.

가족들을 제외하면 모든 이들이 죽었습니다. 집도, 밭도 모든 삶의 터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땅은 진창이 되어버리고, 뻘밭이 되었습니다. 익숙했던 산과 들, 땅의 모양도 바뀌었습니다. 기후도 달라졌습니다. 익숙했던 날씨도 변해 버렸습니다. 달라진 상황에 그들은 당혹스럽습니다. 방주에서 나왔지만, 구원의 기쁨이나 안도감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와 심판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그들 앞에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참사의 생존자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여기서 노아 언약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온 인류와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

첫째, 노아 언약은 온 인류와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입니다. 본문의 9절과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성경의 여러 약속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언약은 대상이 한정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또 다윗에게 주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 가문에 주신 약속입니다. 언약의 대상이 한정됩니다. 물론 오늘 우리도 영적인 후손으로서 그 약속을 이어가고 있지만, 아무리 넓게 봐도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런데 노아 언약은 그 범위에 있어서 차원이 다릅니다. 온 인류와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입니다. 가장 범위가 넓은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혈통이나, 믿음의 여부로 대상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에 있는 짐승도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존하시겠다는 약속,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함부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라고 동물과 식물들을 그냥 죽여도 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 또는 우리 인간은 모든 생명을 대표해서 주님 앞에 서 있을 뿐, 이 언약의 당사자는 모든 생명입니다.

이 언약에 따라 모든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 욕심으로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들에 피는 꽃과 하늘을 나는 새도 돌보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물론 예수님 우리를 아끼신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우리 위를 스쳐 간 새들, 길가에 핀 꽃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아끼십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아끼십니다.

그런데 새와 꽃과 같은 것들은 무언가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계약을 이행할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노아 언약의 두 번째 특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전적인 은혜의 약속

둘째, 노아 언약은 전적인 은혜의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요구사항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언약은 특별합니다.

계약은 보통 상호 간의 의무 사항, 이행 조건이 있습니다. 갑과 을이 계약하면 각자 해야 할 일들을 정하게 됩니다.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 그 계약은 깨어지게 됩니다. 구약의 다른 언약도 그렇습니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도 조건이 붙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당사자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계약은 파기됩니다.

그런데 노아 언약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제시됩니다.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뿐,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이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어떠한 조건도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언약은 전적인 은혜로 맺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해 드릴 게 없습니다. 다른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계약을 이행하십니다. 자기의 권능을 제한하십니다. 우리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분이 먼저 스스로 제한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스스로 제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으나 오래 참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스스로 제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어린 인류에게 한 번만 더 죄지으면 다 없애버릴 거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적인 은혜의 약속을 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변덕스러운 인간에게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자신의 신실함에 기초하여 언약을 맺으십니다. 연약한 인간은 약속을 기억하는 것조차 버거워합니다. 여기서 노아 언약의 또 다른 특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 무지개: 언약의 증거

셋째, 노아 언약은 무지개를 증거로 삼습니다. 그저 말로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증거를 주셨습니다. 언약을 잊지 않도록 특별한 증표를 주십니다.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고대에는 언약을 맺을 때, 증인을 세우거나, 또는 증표를 교환합니다. 그런 관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계약할 때, 공증인을 세우거나 증서를 작성합니다. 여기 결혼반지를 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오늘 반지를 끼려고 했는데, 손가락이 두꺼워져서 끼지를 못했습니다. 결혼반지는 서약의 증표입니다. 결혼할 때 상대에게 한몫 챙기겠다, 어려울 때 팔겠다는 뜻으로 반지를 교환한 게 아닙니다. 결혼 서약을 지키겠다는 증거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 반지를 볼 때마다 서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약을 기억하고자,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무지개가 예쁘니깐 언약의 증표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살펴보면, 무지개는 다른 뜻도 담고 있습니다. 바로 활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무지개 모양은 반원입니다. 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활시위를 걸어 팽팽한 모양입니다. 고대인들은 저 하늘에 걸려 있는 무지개가 어쩌면 활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활에 이미 줄이 감겨 있습니다. 팽팽하게 줄이 감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사이에 활을 들어 언제 화살을 쏘실지 알 수 없습니다. 언약 이전의 사람들에게 무지개는 하나님의 무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언제든 쏠 수 있는 활이 저기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지개를 이제 언약의 증거로 삼으십니다. 무지개를 볼 때마다 모든 생명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한하며,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삼으셨습니다.

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뜰 때마다 사람들도 언약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지, 심판하지 않겠다 약속하셨어!” 하나님의 증거가 저기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에서 언약의 증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의미에서 구원의 의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마치 십자가가 사형의 도구에서 구원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비가 오면 불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무지개를 보며 안심했을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이 비록 그 뜻을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 언약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자들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무지개는 모든 사람과 생명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고 심판을 거두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의미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노아의 언약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먼 옛날 동화 같은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우리 개인의 위기를 넘어 전 세계적 위기고 모든 생명의 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언약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언제 재난이 덮쳐 올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편하게 살고자 이 땅을 망가뜨려 왔습니다. 지금 삶의 수준을 지구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엔 코로나였고 다음에는 무엇일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낙심할 때 더 이상 삶의 소망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버리고 자포자기하게 될 때, 우리는 언약의 증거를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전해야 합니다.

방주가 아니라 무지개

흔히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방주 모양으로 짓기도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방주는 부족합니다. 노아의 가족만 살린 방주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 방주 밖은 다 죽을 테니 우리만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때로는 방주라는 이미지가 우리의 편협함을 드러냅니다. 어쩌면 세상은 방주 이야기를 들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증거가 있습니다. 주께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과 맺은 언약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신 약속입니다. 노아 언약은 아직 유효합니다. 언약의 효력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언약을 기억하는 교회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약속을 전해야 합니다. 언약이 유효하다고 전해야 합니다. 바로 교회가 높이 들린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된 자연, 그리고 시들어 가는 것들로 이 땅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땅은 그렇게 오늘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높이 들린 교회를 볼 때, “그래 저기에 생명이 있어 소망이 있어!” 그런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 저기 교회가 있으니 살았다는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교회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주의 전에 참새와 제비가 깃들어 살 듯, 이 땅의 교회가 생명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너른 품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생명의 상징이 되고, 높이 들린 십자가는 무지개와 겹쳐 보일 것입니다.

마무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의 죄악은 심판받아 마땅하나 주님은 참으십니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고, 증거를 주셨습니다. 무지개를 허락하십니다. 심지어 말 못 하는 짐승과, 들에 핀 꽃과 돌 틈에 난 작은 풀도 언약의 당사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6:26 ...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 모든 피조물을 아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더욱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살리신다 약속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언약의 증거가 되길 원합니다. 이 땅의 교회가 언약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높이 들린 십자가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마치 구름 사이 무지개처럼 말입니다. 이 언덕 높이 있는 십자가에서 무지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언약의 증거를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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